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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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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4-0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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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1일 주일말씀 제목 : 그는 왜 고난받지 않으면 안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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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경만나교…
 조회 : 4,771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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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일 주일예배 본문 : 『이사야53장 2-7절』
제목 : 그는 왜 고난받지 않으면 안되었나? (なぜ、彼は苦難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乾いた地に埋もれた根から生え出た若枝のように/この人は主の前に育った.見るべき面影はなく/輝かしい風格も,好ましい容姿もない.
彼は輕蔑され,人々に見捨てられ/多くの痛みを負い,病を知っている.彼はわたしたちに顔を隱し/わたしたちは彼を輕蔑し,無視していた.
彼が擔ったのはわたしたちの病/彼が負ったのはわたしたちの痛みであったのに/わたしたちは思っていた/神の手にかかり,打たれたから/彼は苦しんでいるのだ,と.
彼が刺し貫かれたのは/わたしたちの背きのためであり/彼が打ち砕かれたのは/わたしたちの咎のためであった.彼の受けた懲らしめによって/わたしたちに平和が與えられ/彼の受けた傷によって,わたしたちはいやされた.
わたしたちは羊の群れ/道を誤り,それぞれの方角に向かって行った.そのわたしたちの罪をすべて/主は彼に負わせられた.
苦役を課せられて,かがみ込み/彼は口を開かなかった.屠り場に引かれる小羊のように/毛を切る 者の前に物を言わない羊のように/彼は口を開かなかった.]
말씀묵상지 [보시니참좋았더라] 3월 15일자에 실린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사람을 아신다)는 제목입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힙니다.
사람을 믿으니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믿느냐 묻지 마세요.
결국엔 서로 상처 받습니다.
믿음은 한쪽으로 움직이는 힘입니다.
까닭을 몰라도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주되 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믿음의 대상에서 실망하면
존재의 밑바닥이 무너집니다.
믿음이 뒤집어져 독한 분노가 됩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랑은 감싸 안습니다.
사랑은 참고 용서하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메아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지성소에 들어가면서부터
그저 주면서 느끼는 기쁨이 무엇인지 압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잘 아십니다.
사람을 믿지 않으십니다.
그저 사랑하십니다. (끝)
여러분은 이 시에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예전에 믿었다가 발등찍힌(속았던, 당했던) 기억이 떠오르셨습니까?
아! 맞다. 사람은 믿으면 안돼. 라는 것을 깨달으셨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사람이 친절하게 해주고, 나한테 좋은 말 해주면 그 사람을 믿어버립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사람이 친절하지 않거나, 나에게 좋은 말이 아니라, 잘되도록 하는 따끔한 말을 하면, 그 믿음이 깨져버리고, 미워지고, 분노하게 됩니다.
2천년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5병2어의 기적을 보여주며, 주린 배를 채워주셨던 그 예수님, 불치병을 고쳐주시고, 은혜로운 말씀으로 몇시간씩 설교해 주셨던 그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시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그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들을 로마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줄줄 알았는데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재판장에게 넘겨졌고, 아무 항변도 하지않고, 사형수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죽어서는 안되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예수가 자기들에게 일어나서 싸우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그 말을 믿고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반대로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불과 3-4일전만 해도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시겠습니까?
마태복음21:7-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ろばと子ろばを引いて來て,その上に服をかけると,イエスはそれにお乘りになった.大勢の群衆が自分の服を道に敷き,また,ほかの人々は木の枝を切って道に敷いた.そして群衆は,イエスの前を 行く者も後に從う者も叫んだ.「ダビデの子にホサナ.主の名によって來られる方に,祝福があるように.いと高きところにホサナ.」]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가에 자신들이 입었던 겉옷을 벗어 깔고, 나무가지를 잘라 길가에 뿌리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외치며 환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환영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을 지금의 고난에서 해방시켜 줄 사람인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고난이 무엇입니까?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는 사회적인 환경의 고난이었습니다. 힘들고 병들어 있는 육체적인 고난도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돈이 없고 배가고픈 고난도 있었고, 힘이 없고 권력이 없어 서러운 고난도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모든 고난을 해방시켜 줄 사람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싸우자고 하면 일어나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자신들의 고난을 해방시켜 줄 선지자로 믿었던 그 예수님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그 고난에서 해방될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외칩니다.
요한복음 19:15-16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하소서 없이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彼らは叫んだ.「殺せ,殺せ.十字架につけろ.」ピラトが,「あなたたちの王をわたしが十字架につけるのか」と言うと,祭司長たちは,「わたしたちには,皇帝のほかに王はありません」と答えた.そこで,ピラトは,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イエスを彼らに引き渡した.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を 引き取った.]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형편이 좀 나아지도록 기도하기 위해서 믿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수 있을지 몰라서 믿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병을 고쳐보려고 믿기도 합니다. 마치 2천년전 유대인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좀더 나은 생활로 이끌어 주기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2천년 유대인들도 죄를 지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대로는 그들도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멸망받아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여 그 죄와 형벌로부터 생명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가 지은 자기 죄로 인하여 자기 피를 흘려 죽어야 하는 심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살고 있는가? 어떤 좋은 집에 살고 있는가?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가? 얼마나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건강하고 잘생긴 육체를 가지고 있는가? 이런 것은 죄를 심판하는데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단지, 그 죄는 죽음으로만 씻을수 있다는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지요, 사람들은 어느 한사람도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음의 심판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른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기 때문에 심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죄를 심판받고, 형벌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질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죽어야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받지 않아도 되는 고난의 길, 인간의 길을 선택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종종 지금 먹고사는 생활이 힘든 것을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아니요, 그런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아프고 병든 것을 고난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아니요, 그런 것도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이란, 내가 겪지 않아도 되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스스로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길, 고난의 길을 오시지 않았다면, 그가 만약 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어주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모두는 한사람도 남김없이 심판받고, 멸망받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꼭 그 고통스러운 사형장인 십자가나무에 못박혀 죽어야 하는 고난을 선택하셨을까요? 왜 꼭 그렇게 힘든 고난의 방법을 선택하셔야 했을까요?
왜 그는 그런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이것이 오늘의 과제입니다.
그렇게 고난받고 죽어야 해결될 정도로 우리의 죄가 크고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죽어야 하는 사형수의 죄를 우리가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 때문에, 나의 죄의 무게 때문에 가장 처참한 형벌의 길을 가셔야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21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知ってのとおり,あなたがたが先祖傳來のむなしい生活から·われたのは,金や銀のような朽ち果てるものにはよらず,きずや汚れのない小羊のようなキリストの尊い血によるのです.キリストは,天地創造の前からあらかじめ知られていましたが,この終わりの時代に,あなたがたのために現れてくださいました.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て榮光をお與えになった神を,キリストによって信じています.從って,あなたがたの信仰と希望とは神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오래전,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자기 집에서 기르던 양들 가운데 아직 어리고 가장 건강한 어린 양 한 마리를 골라서 제사장에게 가져갑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이야기하고 용서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양의 주인이 보는 앞에서 그 주인의 죄를 대속한 어린양의 몸을 가르고 피를 받아 그 주인의 죄를 대속해달라고 하나님께 피의 제물을 드립니다. 아무 죄없는 순진한 어린양이 몸이 찢겨지며, 피를 흘려 자신의 죄를 대속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양의 주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묘사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苦役を課せられて,かがみ込み/彼は口を開かなかった.屠り場に引かれる小羊のように/毛を切る 者の前に物を言わない羊のように/彼は口を開かなかった.]
이제 내일부터 한주간은 [고난주간]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한주간입니다.
해마다 크리스천들은 고난주간을 그 나름대로 의미있게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고난주간이란 2천여년 전에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심문과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한주동안의 시간을 말합니다. 이 시기에 교회들 중에는 성금요일 성만찬의 순서를 갖기도 합니다. 우리교회도 이번주 수요일은 저녁 8시에 고난주간 특별기도회로 회개와 묵상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고난 주간에 이러한 순서를 갖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의 행적을 기억하며 그 행적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그 행적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는가?입니다. 이 시기에는 금식이나 고행을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금식이나 고행 등의 행위를 목적도 없이 단지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 자체를 경험해보자는 식으로 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행위는 온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따른다고 한다면, 역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던가, 나의 죄를 회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나의 십자가를 지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고난주간에 우리가 생각해 보는 십자가와 예수님의 고난이 주는 의미, 성만찬을 나누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만찬에서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가 의미하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거룩한 행사를 그 순간만 겸허하게 다짐하는 정도에서 머물고 말 때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나의 삶은 어떠한가? 나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신자로서 나도 예수님처럼 자신의 살과 피를 이웃을 위하여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묵상하여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희생을 실천하는 크리스천들도 있지만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기보다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실천하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한마디라도 더 해야 내가 높아지는 것 같았고, 내 이름이 드러나야지 헌금하는 의미를 가지고 교회를 다닌 날들이 더 많지 않았나요? 오늘 반드시 그렇게 고난받아야만 했던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이 오늘 나에게 얼마나 피부에 느껴지고 있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고난주간을 기점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나를 위하여 살과 피를 나누어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이제 나도 그렇게 희생하며 내 십자가를 지기를 결심해야 합니다.
오늘은 다음 부활주일인 다음주일까지 사순절의 한주간을 남겨놓은 시간입니다.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그 고난으로 구원받은 은혜의 감격과 감사로 이 한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평소에는 주일만 행복하고, 나머지 6일은 세상과 싸우느라 행복하지 않았다고 느꼈던 분들도 이번 한주간은 매일매일 구원받은 감격과 나 대신 매일 고난가운데 계셨던 예수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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