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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12 15:50
2012년 8월 12일 주일예배 [위험한 그리스도인]
 글쓴이 : 동경만나교…
조회 : 8,515   추천 : 0  
2012년 8월12일 주일예배  본문 :『마태복음 5:13』

제목 : 위험한 그리스도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あなたがたは地の鹽である.だが,鹽に鹽氣がなくなれば,その鹽は何によって鹽味が付けられよう.もはや,何の役にも立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ある..]


이 세상에는 세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을 곤충으로 비교하면, 꿀벌과 같은 사람, 개미와 같은 사람, 거미와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꿀벌과 같은 사람은 열심히 꽃의 꿀을 모아서 자신도 먹지만, 사람들에게도 꿀을 제공해주는 유익하고 꼭 필요한 사람을 말합니다.

개미와 같은 사람이란, 열심히 일을 해서 먹이를 모으지만, 개미만 들어갈 수 있는 땅속 깊은 창고에 먹을 것을 쌓아놓고 자신들만 유익이 되는 사람으로 있으나 없으나 관계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거미와 같은 사람이란, 거미줄을 만들어 놓고, 숨어있다가 다른 곤충들이 거미줄에 걸리면 곤충들을 잡아먹고 사는 위험하고 악해서 필요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도 이렇게 세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모두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어떤 신자는 꿀벌처럼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신자가 있습니다.

또 다른 어떤 신자는 개미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자신만 열심히 믿을 뿐, 다른 사람의 믿음생활과 관계없이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위험한 신자가 있습니다. 거미처럼 다른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거나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잡아먹고 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자신의 속에 있는 아픔과 상처와 독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어서 모두가 조심하는 위험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그렇게 위험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말씀을 통해서 은혜와 진리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여러 가지 위험한 그리스도인의 종류가 있습니다만, 특별히 가장 위험한 그리스도인의 종류를 런던올림픽 메달순위처럼 나누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올림픽처럼 명예로운 메달순위가 아니라, 부끄러운 순위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제3위, 동메달수상자는, 신앙생활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을 왜 믿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わたしとわたしの言葉を恥じる者は,人の子も,自分と父と聖なる天使たちとの榮光に輝いて來るときに,その者を恥じる.]

예수님을 믿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은, 자신감이 없고, 사람들에게 당당하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것이 부끄러운 사람이 무엇을 한들, 자랑스럽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예수그리스도가 유대인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처음 믿고 따르게 된 12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랑이었고, 자신들의 명예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에게 말씀을 듣고,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자신만만했고, 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제자의 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이 본 것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질병을 가진 환자라도 못고치는 일이 없었고,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플때면,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서, 수천명이 배가 부르게 먹고 남는 일들이 눈앞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성경학자라도, 율법선생이라도, 바리새인이라도, 사두개인이나 제사장이라도 예수님 앞에 오면, 머리를 숙이고, 진리의 말씀을 배워 갔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 앞에 오면, 회개하고 용서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렇게 무려 3년이 넘는 시간을 예수님의 제자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어느날,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않고, 제사장의 종들과 군인들에게 잡혀갔고, 예수님의 제자가운데 가장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간 날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부끄러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태복음 26:69-75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ペトロは外にいて中庭に座っていた.そこへ一人の女中が近寄って來て,「あなたもガリラヤのイエスと一緖にいた」と言った./ ペトロは皆の前でそれを打ち消して,「何のことを言っているのか,わたしには分からない」と言った./ ペトロが門の方に行くと,ほかの女中が彼に目を留め,居合わせた人々に,「この人はナザレのイエスと一緖にいました」と言った./ そこで,ペトロは再び,「そんな 人は知らない」と誓って打ち消した./ しばらくして,そこにいた人々が近寄って來てペトロに言った.「確かに,お前もあの連中の仲間だ.言葉遣いでそれが分かる.」/ そのとき,ペトロは呪いの言葉さえ口にしながら,「そんな人は知らない」と誓い始めた.するとすぐ,鷄が鳴いた./ペトロは,「鷄が鳴く前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うだろう」と言われたイエスの言葉を思い出した.そして外に出て,激しく泣いた.]

그렇게 예수님을 위해 죽는 자리까지 함께 하겠다고 결심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혔던 그날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부끄러워 했던 것일까요? 베드로의 모습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어주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겸손하게 죽음을 선택하신 겸손한 예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가 따라다니며, 찬송을 받고 존경을 받던 왕같은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로마제국과 싸워 승리하여 황제가 될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기에 자신의 기대와 다른 예수님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감추고 부인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믿음입니다. 교회 밖으로 나가면, 우리의 믿음은 부끄러워지며,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면, 우리의 믿음의 존재를 감추고 부인하게 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잡혔갔던 날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신앙으로는 우리는 하나님에게 부끄러운 제자가 될수 있습니다. 천국문에서 거절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는 믿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베드로가 언제,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이 혹시라도 십자가위에서 기적을 일으켜서 로마군인을 다 멸망시키고, 내려오실줄 기대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가 있다가 그런 기적을 보고, 자신들을 장군들로 삼아서 왕이 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완전하게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실망하고 절망하여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자신들도 잡아가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문을 닫아 걸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닫힌 방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부활하신다고 했던 예수님을 기억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아니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전에 했던 일, 먹고살기 위해 어부의 일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하는 부끄러움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습과 어쩌면 그렇게 동일할까요.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지만, 우리는 때때로, 거의 매일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며, 살아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만나고,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알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변한 것은 예수님이 찾아오신 어느 날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21:12-17절 말씀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イエスは,「さあ,來て,朝の食事をしなさい」と言われた.弟子たちはだれも,「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問いただそうとはしなかった.主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たからである./ イエスは來て,パン を取って弟子たちに與えられた.魚も同じようにされた./ イエスが死者の中から復活した後,弟子たちに現れたのは,これでもう三度目である./ 食事が終わると,イエスはシモン·ペトロに,「ヨハネ の子シモン,この人たち以上に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と言われた.ペトロが,「はい,主よ,わたしがあなたを愛していることは,あなたがご存じです」と言うと,イエスは,「わたしの小羊を飼いなさい 」と言われた./ 二度目にイエスは言われた.「ヨハネの子シモン,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ペトロ が,「はい,主よ,わたしがあなたを愛していることは,あなたがご存じです」と言うと,イエスは,「わたしの羊の世話をしなさい」と言われた./ 三度目にイエスは言われた.「ヨハネの子シモン,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ペトロは,イエスが三度目も,「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と言われたので,悲しくなった.そして言った.「主よ,あなたは何もかもご存じです.わたしがあなたを愛していることを,あなたはよく知っておられます.」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の羊を飼いなさい.]

세 번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제자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면,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제자들은 다시 제자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어서 예수님의 제자처럼 생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능력이 없어서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났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만났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예수님을 부끄러워했고, 부인했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은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부끄러워했던 죄로 인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고, 이날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 요한의 아들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ヨハネの子シモン,この人たち以上に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 わたしの小羊を飼いなさい.
ヨハネの子シモン,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 わたしの羊の世話をしなさい.
ヨハネの子シモン,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 わたしの羊を飼いなさい.]

베드로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 살리신 예수님의 양을 양육하고, 돌보도록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베드로의 범죄를 비난하고, 회개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예수님의 양들을 맡겨주시는 것으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사랑한다고 표현해 주신 것입니다.

용서받은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때부터 그리스도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자신의 죄로 인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이나, 믿음생활하는 것에 장애를 받지 않습니까? 어느 일요일 아침에 지난 날의 자신의 죄와 분노로 인하여 주일예배를 거절하지는 않습니가?

전날에 저질렀던 죄와 냄새들로 인하여 하나님 만나기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나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까지 다 알고, 사랑해 주십니다. 잘못된 것임을 알면 됩니다.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고백할수 있으면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두 해결됩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죄는 죄책감이 더 무겁고 더 오래동안 우리를 붙잡는 멍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앞에 용서받은 자신을 회복하고 부끄러움을 던져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제2위, 은메달수상자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구분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같은 율법적인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없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3:11-17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そこに,十八年間も病の靈に取りつかれている女がいた.腰が曲がったまま,どうしても伸ば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 / イエスはその女を見て呼び寄せ,「婦人よ,病氣は治った」と言って,/ その上に 手を置かれた.女は,たちどころに腰がまっすぐになり,神を贊美した./ ところが會堂長は,イエス が安息日に病人をいやされたことに腹を立て,群衆に言った.「働くべき日は六日ある.その間に 來て治してもらうがよい.安息日はいけない.」/ しかし,主は彼に答えて言われた.「僞善者たちよ,あなたたちはだれでも,安息日にも牛やろばを飼い葉桶から解いて,水を飮ませに引いて行くではないか./ この女はアブラハムの娘なのに,十八年もの間サタンに縛られていたのだ.安息日であっても,その束縛から解いてやるべきではなかったのか.」/こう言われると,反對者は皆恥じ入ったが,群衆はこぞって,イエスがなさった數々のすばらしい行いを見て喜んだ.]
 
회당장은 다른 성경에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라는 사람들은 일반인들보다 성경을 더 잘 알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을뿐, 믿지도 않았으며, 실천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화-김병삼목사님의 책, 하나님을 가슴뛰게 하는 이야기에서)

사랑없는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경은 믿음이 있으나,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한다.

주변에서 믿음은 있으나, 사랑이 없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사랑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 아는가?

사랑이 없는 믿음을 지키려고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수 있는지 아는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을 했고, 수많은 학살이 자행되었다.

인류의 분쟁가운데 가장 잔혹한 전쟁은 종교분쟁이었다.

사랑없는 믿음은 무서운 것이다.

사랑없는 믿음은 진리를 앞서간다.

믿음이 절대화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진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랑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유함이 없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율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다.

당신의 믿음으로 누구를 비난하기 전에, 그 사람을 사랑하라.


미국의 가장 아름다운 교회건물중의 하나가 크리스탈 캐더드럴 처치이다.

한번은 후안까를로스목사님이 그곳에서 강의하는 중에, 한 청년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꼭 교회를 이렇게 아름

답고 사치스럽게 지어야합니까? 이 돈을 아프리카에 보내면 좋지않냐고?” 그때 목사님이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은 그 돈으로 먹을 것을 다 주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청년은 지금 그 아프리카를 위

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아프리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교회건축이 자신의 신념과 믿음에 맞지않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 우선이 아니라, 사랑이 우선이다.

(예화) 얼마전에 [머신건 프리쳐]라는 영화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는 실화를 배경으로 [샘 칠더스]라는 선교사의 이야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는 갱이었다가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아프리카 수단에 단기선교를 갔다가, 내전으로 어른들의 희생이 되는 어린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수단에 남아 총을 들고 싸웁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제 눈에는 점점 문제가 보이는 것입니다.

가족을 고통스럽게 하던, 갱스터가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었는데, 아프리카 수단의 어린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오랜 시간 기다림 끝에 되찾은 남편과 아빠가 다시금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고 아프리카로 떠나간 것입니다.

또한, 자동차 사업을 하는 부자에게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서 구호금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의 초청을 받아 갔던 호화로운 파티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구호금을 얻지 못하자, 화를 내며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도 보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우리들은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라는 이유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내 믿음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믿음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까지 감추어 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두 번째야.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결코 성경에서 말씀하신 믿음도 아니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진리를 넘어 선, 나의 믿음일 뿐입니다.

이 잘못된 믿음의 우선순위가 얼마나 우리를 왜곡시키고, 오해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우선순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우리는 바리새인과 율법선생처럼, 내가 정한 믿음의 우선순위 때문에, 정작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사랑을 전하는 일은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1위, 금메달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한마디로 말해서, 왜 사는지 목적이 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먼저 믿은 모든 사람들의 믿음의 이유이며, 권리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부탁하신 지상최고의 명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는 것은 가장 위험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가복음 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確かに鹽は良いものだ.だが,鹽も鹽氣がなくなれば,その鹽は何によって味が付けられようか.畑にも肥料にも,役立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るだけだ.聞く耳のある者は 聞きなさい.」]

우리는 아무 가치도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시고, 우리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시면서 우리는 짠맛을 가진 소금이 되었습니다. 소금의 기능은 음식에 맛을 내고, 부패하고 상하지 않도록 보존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이 짠맛을 내지 못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소금은 만들어질 이유가 없는 것이죠.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바다에 속아 없어져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집에 있는 모든 소금을 가져다가 쓰레기통에 버려버릴 것입니다. 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은 쓰레기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1년이 가도, 한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은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자기는 구원받아서 천국가고, 가족이나, 친구들은 자기한테 복음을 들어본 적도 없어서 모두 지옥가야 한다면, 과연, 복음을 전하지 않고 천국가는 사람이 당당하게 천국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이 시간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6-18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もっとも,わたしが福音を告げ知らせても,それはわたしの誇りにはなりません.そうせずにはいられないことだからです.福音を告げ知らせないなら,わたしは不幸なのです./ 自分からそうしているなら,報酬を得るでしょう.しかし,强いられてするなら,それは,ゆだねられている務めなのです./では,わたしの報酬とは何でしょうか.それは,福音を告げ知らせるときにそれを無報酬で傳え,福音を傳えるわたしが當然持っている權利を用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로다. (福音を告げ知らせないなら,わたしは不幸なのです) 일본어성경은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부드러운 표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행하다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며 소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인생은 복음을 전하는 인생뿐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즉, 다시말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위험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교회의 부흥도 일어나지 않지만, 여러분 한사람한사람 개인의 부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집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고, 가정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개인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은 없는 믿음의 행위로 끝날수가 있습니다.

나가서 그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믿음만 있는 위험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복음을 전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는 이 세상에 너무나 위험한 존재라고,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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