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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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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9-01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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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경만나교…
 조회 : 3,489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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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말하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喋る人、動く人)
본문 : 잠언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愛を求める人は罪を覆う.前言を飜す者は友情を裂く.)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손을 뻗어 밖으로 나가는 에서의 발목을 붙잡고 따라 나왔다고 해서 그 이름을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도 다툽니다. 자기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동생을 때리고, 동생은 반항합니다. 어른이 되어도 누가 장자(長子)인가를 위해 다툽니다. 결국이 다툼이 민족과 민족을 나누고, 한 집안에서 함께 살지 못하는 불행한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목사님들이 운동을 하러 모였습니다.
축구를 하다가도 인(in)과 아웃(out)을 다투다가 운동도 못하고 돌아가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70세가 넘어 인생을 충분히 경험하신 권사님들도 “왜 나 빼놓고 니들끼리 하냐?”며 다투는 모습을 봅니다. 어떤 스포츠를 해도 자기가 이기기 않으면, 얼굴이 붉어지고 화를 냅니다. 이런 다툼이 왜 생길까요? 그 답은 하나입니다. “누가 더 크냐?”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도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났습니다.
예전에도 계속 이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처음 예수님께 부름받은 제자였을때라면 모르지만, 이제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기적을 체험하는 증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예수님의 행동과 삶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3년이나 훈련 받았습니다.
방금 전에 예수님께서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도 이렇게 섬겨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투었습니다. 심지어 떡과 잔을 나누면서 새 시대는 이렇게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주의 만찬을 나누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투었습니다.
“누가 크냐? 누가 먼저냐? 누가 이겼냐? 누가 어떻게 대접받았나? 누가 무엇을 받았나? ”
이 모든 것들은 세상의 가치관의 기준입니다. 이런 대결에서 밀려나고,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열등감이 생깁니다. 패배감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양보한 것이 아니라 졌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양보해주어도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양보하지 않으려다고 빼앗겼다고 생각되니까 패배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부끄럽지 않으려고 왜곡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마음에 자물쇠를 채워 버립니다. 접근하지 말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는 그런 자기자신을 지키겠다고 거짓말도 하고, 부풀려 말하기도 합니다. 행동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것을 무기로 삼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느 먼저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 대야에 물을 담아 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먼저인가? 누가 윗사람인가? 누가 대접받아야 하는 위치인가?
이런 세상의 모든 사고방식을 무너뜨리는 행동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당황하며 예수님의 행동을 거부했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나의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요. 예수님이 만드신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야 예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이 새롭게 세우신 질서는 무엇입니까? “누가 크냐?” 라고 따지고 묻는 말의 가치관, 즉 이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누가 섬기겠느냐?” 라고 하는 조용하지만 무거운 마음과 행동의 가치관이었던 것입니다.
행동해야 할 사람, 섬겨야 할 사람이 섬기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직 변화되지 않은 세속적인 가치관을 향하여 사탄이 공격합니다. 그 마음에 서운한 생각을 자극합니다. “나를 그렇게 우습게보다니? 내가 이런 일 할 사람인줄 알아?” 섬기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섬겨야 할 일 때문에 시험에 자주 들고, 자주 미끄러져 넘어집니다. 날마다 자기중심적이다 보니 자기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위에 서지 않으면 열등감이 생기고, 패배감과 수치심으로 가득 찹니다. 그것을 감추려고 말이 많아지고, 큰 소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행동하지 않는 세속적인 가치관은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뉴스에서 본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의인은 죽음 후에도 진실이 밝혀진다. 는 것을 소개합니다.
유대인 수천명의 목숨을 나치로부터 구했으나 공문서위조죄로 공직에서 쫓겨난 스위스의 한 경찰관이 우여곡절 끝에 사후 40여년만에 스위스 경찰에서 복권됐습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지난 1972년 81세로 사망한 상트갈렌 칸톤의 폴 그루엔잉거 전 경찰국장입니다. 상트갈렌 칸톤의 프레디 패슬러 경찰국장은 22일 "그루엔잉거는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돼야 한다"고 찬사를 보내고 본청에 기념명패를 설치했습니다.
1919년부터 20년간 오스트리아와 접하고 있는 칸톤 경찰국장으로 일한 그는 1937∼1939년 오스트리아에서 나치 박해를 피해 불법으로 입국한 유대인 2천∼3천명에게 입국서류를 발행해 주었습니다. 영세중립국 스위스는 당시 이민규제를 강화한 상태였고 1939년에는 기존 규제를 한층 강화했습니다. 즉, 인종, 종교 때문에 박해받을 위험이 있는 사람들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적인 박해를 받을 위험이 있는 사람만 난민으로 입국을 허용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대인은 입국 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그루엔잉거는 그러나 정부의 이민 정책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대인들이 강력한 이민지침이 시행되기 이전에 입국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주고 거처도 알선해 주었습니다. 그루엔잉거의 이같은 조치는 결국 발각돼 1940년 재판을 통해 불명예 퇴직하였습니다. 공직에서 쫓겨난 후 변변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연금마저 받을 수 없어 겨우 연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재단은 그루엔잉거가 죽은 다음 해인 1973년 그의 공적을 확인하고 '의인'으로 인정했습니다. 스위스 국내에서도 1990년대 재판을 통해 그루엔잉거 사후복권을 확인했으나 경찰 당국은 뒤늦게 그의 결단을 칭송하고 기념명패를 설치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쌓아올린 인생의 모든 직위와 경력을 버리고, 의로운 일을 행동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고, 법을 따지고, 규칙을 따질 때, 이 사람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따라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 결과 수천명의 유대인의 생명이 보호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로운 행동은 수 천명의 생명이 살아남았고, 그들의 자손들이 살아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그를 바보라고 부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로운 행동은 진실을 지켜내었고, 수 십년이 지난 지금 이 세상의 가치관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말합니다. 바보같은 크리스찬들,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에 돈을 벌어라! 잠을 자고 쉬어라!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한 행동을 증명하는 분입니다. 그래 말하지 말고, 행동해라, 나는 너의 겸손한 예배를 원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두 가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愛を求める人は罪を覆う.前言を飜す者は友情を裂く.)
사랑은 잘못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말하는 것은 친구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아무도 비판하지 말라! (人を裁くな!)
죄를 지은 사람의 착각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그 사람 잘못이라고 하며, 자신의 죄가 가벼워 질것이라 착각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를 지으면, 올바른 생각,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 한, 계속적으로 잘못된 판단과 타인을 향한 비난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감추어 주기 보다는, 심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심판의 자리에 서서 큰 소리로 판결을 내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들으면서 성경을 읽게되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깨달아지게 되고, 그때, 비로서 내 죄도 깨달아집니다. 내 더러운 모습들이 보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다른 사람이 어떤 모습이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내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죄인인 나를 하나님이 사랑해 주신다는 은혜가 나를 하나님앞에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잘못이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이 보이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위선자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 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사람입니다. 선이 아닌데, 선인 것처럼 속이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사랑받아 구원받았다면,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고, 사랑할 자격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내 맘에 안들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저 사람의 생각은 내 생각과 달라서 언제나 나와 다르지만, 그도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내 성격과 달라서 언제나 다른 말을 하지만,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것이 말이 아닌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것을 깨닫도록 행동으로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1서 4:6-12절 말씀을 다같이 찾아서 읽겠습니다.
6.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7.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6.わたしたちは神に屬する者です.神を知る人は,わたしたちに耳を傾けますが,神に屬していない者は,わたしたちに耳を傾けません.これによって,眞理の靈と人を惑わす靈とを見分けることができます./ 7.愛する者たち,互いに愛し合いましょう.愛は神から出るもので,愛する者は皆,神から生まれ,神を知っているからです./ 8.愛することのない者は神を 知りません.神は愛だからです./ 9.神は,獨り子を世にお遣わしになりました.その方によって,わたしたちが生き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ここに,神の愛がわたしたちの內に示されました./ 10.わたしたちが神を愛したのではなく,神がわたしたちを愛して,わたしたちの罪を償ういけにえとして,御子をお遣わしになりました.ここに愛があります./ 11.愛する者たち,神がこのようにわたしたちを愛されたのですから,わたしたちも互いに愛し合うべきです./ 12.いまだかつて神を見た者はいません.わたしたちが互いに愛し合うならば,神はわたしたちの內にとどまってくださり,神の愛がわたしたちの內で全うされているのです.
10절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기억하고 간직하고 살아가야 하는 진리입니다.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10.わたしたちが神を愛したのではなく,神がわたしたちを愛して,わたしたちの罪を償ういけにえとして,御子をお遣わしになりました.ここに愛があります.)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움직이셨습니다.
우리가 입술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불순종하고 있을때에 하나님은 침묵속에서 일하셨습니다.
그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위에 내어 주시기 위해 움직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행동이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행동이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아버지도 예수그리스도도 말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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