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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4-13 09:27
2014년 4월 13일 열다섯번째 주일말씀
 글쓴이 : 동경만나교…
조회 : 3,683   추천 : 0  
본문 : 『이사야53장 2-6절』
제목 :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라
(イエスキリストの苦難を黙想せ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乾いた地に埋もれた根から生え出た若枝のように/この人は主の前に育った.見るべき面影はなく輝かしい風格も,好ましい容姿もない./ 彼は輕蔑され,人々に見捨てられ多くの痛みを負い,病を知っている.彼はわたしたちに顔を隱しわたしたちは彼を輕蔑し,無視していた./ 彼が擔ったのはわたしたちの病/彼が負ったのはわたしたちの痛みであったのにわたしたちは思っていた神の手にかかり,打たれたから彼は苦しんでいるのだ,と./ 彼が刺し貫かれたのはわたしたちの背きのためであり彼が打ち砕かれたのはわたしたちの咎のためであった.彼の受けた懲らしめによってわたしたちに平和が與えられ/彼の受けた傷によって,わたしたちはいやされた./ わたしたちは羊の群れ道を誤り,それぞれの方角に向かって行った.そのわたしたちの罪をすべて主は彼に負わせられた.]

사람은 마음으로 보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을 믿는 경향이 강합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사람을 믿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사람이 친절하게 해주고, 나한테 좋은 말 해주면 그 사람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믿고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해주지 않거나, 원하는대로 해주지 않으면, 배신감을 느끼고, 실망하고, 미워하고, 분노합니다.

2천년에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5병 2어의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며, 배고픈 배를 채워주셨던 예수님, 수많은 사람들의 불치병을 고쳐주시고, 은혜로운 말씀으로 몇 시간씩 설교해 주셨던 그 예수님이 그렇게 쉽게 스스로 생명을 내어 죽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유대민족을 로마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않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재판장에게 넘겨졌으며, 항변도 하지 않고, 십자가 처형장으로 끌려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3년반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제자가 되었던 자신들이 당연히 예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에 의하여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국을 세워 자신들은 높은 자리에 앉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힘없이 죽어서는 안되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예수가 자기들에게 일어나서 싸워 승리하라고 말하지 않고,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은 죄없는 어린양처럼 처참하게 죽어야 한다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믿었던 기대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반대로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불과 몇 일 전에 이들이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마태복음21:7-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ろばと子ろばを引いて來て,その上に服をかけると,イエスはそれにお乘りになった.大勢の群衆が自分の服を道に敷き,また,ほかの人々は木の枝を切って道に敷いた.そして群衆は,イエスの前を 行く者も後に從う者も叫んだ.「ダビデの子にホサナ.主の名によって來られる方に,祝福があるように.いと高きところにホサナ.」]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가에 자신들이 입었던 겉옷을 벗어 깔고, 나무가지를 잘라 길가에 뿌리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ダビデの子にホサナ.主の名によって來られる方に,祝福があるように.いと高きところにホサナ.」)
라고 외치며 환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환영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을 지금의 고난에서 해방시켜 줄 사람인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고난이 무엇입니까?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회적인 환경의 고난이었습니다.
힘들고 병들어 아픈 육체의 고난도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돈이 없는 배고픈 고난도 있었고,
힘이 없고 권력이 없는 약한 자의 서러운 고난도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모든 고난에서 해방시켜 줄 사람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싸우자고 하면 일어나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자신들의 고난을 해방시켜 줄 선지자로 믿었던 그 예수님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그 고난에서 해방될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외칩니다.

요한복음 19:15-16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하소서 없이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彼らは叫んだ.「殺せ,殺せ.十字架につけろ.」ピラトが,「あなたたちの王をわたしが十字架につけるのか」と言うと,祭司長たちは,「わたしたちには,皇帝のほかに王はありません」と答えた.そこで,ピラトは,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イエスを彼らに引き渡した.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を 引き取った.]

오늘 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각각의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형편이 좀 나아지도록 기도하기 위해서 믿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수 있을지 몰라서 믿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병을 고쳐보려고 믿기도 합니다.
이 모습은 마치 2천년전 유대인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좀 더 나은 생활로 이끌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2천년 유대인들도 모두 죄를 지은 죄인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죄인인 상태로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멸망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여 그 죄와 형벌로부터 생명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가 지은 자기 죄로 인하여 자기 피를 흘리고 죄의 값을 치르고 죽어야 하는 심판을 받아야만 합니다.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살고 있는가?
어떤 좋은 집에 살고 있는가?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가?
얼마나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건강하고 잘생긴 육체를 가지고 있는가?
이런 것은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단지, 그 죄는 죽음으로만 씻어 줄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지요, 사람들은 어느 한사람도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음의 심판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른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기 때문에 심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죄를 심판받고, 형벌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질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줄 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죽어야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의 죄를 대신 갚아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받지 않아도 되는 고난의 길,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어주는 길을 선택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종종 지금 먹고사는 생활이 힘든 것을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아니요, 그런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아프고 병든 것을 고난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아니요, 그런 것도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이란, 내가 겪지 않아도 되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스스로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길, 고난의 길을 오시지 않았다면, 그가 만약 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모두는 한사람도 남김없이 심판받고, 멸망 받아야만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꼭 그 고통스러운 사형장인 십자가나무에서 못에 몸이 박혀 죽어야 하는 고난을 선택하신 것입니까?
왜 꼭 그렇게 힘든 고난의 방법을 선택하셔야 했을까요?
왜 그는 그런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을까요? 이것이 오늘의 과제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고난받고 피를 흘려야 갚아질 정도로 우리의 죄가 크고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죽어야 하는 사형수의 죄를 우리가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 때문에, 나의 죄의 무게 때문에 가장 처참한 형벌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21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知ってのとおり,あなたがたが先祖傳來のむなしい生活から·われたのは,金や銀のような朽ち果てるものにはよらず,きずや汚れのない小羊のようなキリストの尊い血によるのです.キリストは,天地創造の前からあらかじめ知られていましたが,この終わりの時代に,あなたがたのために現れてくださいました.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て榮光をお與えになった神を,キリストによって信じています.從って,あなたがたの信仰と希望とは神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오래전,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자기 집에서 기르던 양들 가운데 아직 어리고 가장 건강한 어린 양 한 마리를 골라서 제사장에게 가져갑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이야기하고 용서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양의 주인이 보는 앞에서 그 주인의 죄를 대속한 어린양의 몸을 가르고 피를 받아 그 주인의 죄를 대속해달라고 하나님께 피의 제물을 드립니다. 아무 죄없는 순진한 어린양이 몸이 찢겨지며, 피를 흘려 자신의 죄를 대속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양의 주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묘사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苦役を課せられて,かがみ込み/彼は口を開かなかった.屠り場に引かれる小羊のように/毛を切る 者の前に物を言わない羊のように/彼は口を開かなかった.]

이제 내일부터 한 주간은 [고난주간]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한주간입니다.
해마다 크리스천들은 고난주간을 그 나름대로 의미있게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고난주간이란 2천여년 전에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심문과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한주동안의 시간을 말합니다. 이 시기에 교회들 중에는 聖수요일, 聖금요일에 특별한 시간을 갖고 고난의 예수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교회도 이번 주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 8시에 고난주간 특별 저녁기도회를 갖고, 예수님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고난 주간에 이러한 순서를 갖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고난이 오늘 우리 자신에게 전해주는 의미를 생각하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깨닫는 시간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 고난주간에는 금식이나 고행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금식이나 고행 등의 행위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 자체를 경험해보자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행위는 온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기에, 만약 우리들이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묵상하기 위하여 금식을 한다면, 그 이유는 누군가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고난주간에 우리가 생각해 보는 십자가와 예수님의 고난이 주는 의미, 성만찬을 나누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만찬에서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찟기시고 흘리신 예수님의 육체와 피를 증거하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오늘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나의 인생은 선한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있는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빚지고 구원받은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리스도인으로서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것을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나누어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그렇게 희생하고 내어주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앞에 서야 내가 더 높아지는 것 같고,
내 이름이 드러나야 내 자존감이 더 높아지는 것 같지 않았나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나를 구원하시고 높여주시기 위하여 당신은 끝없이 낮아지고, 겸손하여 죽을때까지 순종하신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주간 고난주간을 기점으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조용하게 돌아봅시다.
이런 나를 위하여 살과 피를 모두 내어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이제 나도 그렇게 남을 위해 희생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를 결심합시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그 고난으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드리는 고난주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6일은 세상과 싸우느라 행복하지 않았다고 느꼈던 성도님, 주일만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성도님, 이번 한 주간 매일매일 구원받은 감격의 시간을 보내시기 바라며, 나를 대신하여 고난의 십자가에 올라가셨던 예수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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