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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22 08:56
2013년 09월15일 서른일곱번째주일 "주가 쓰시겠다 하라"(김래현목사)
 글쓴이 : 동경만나교…
조회 : 3,984   추천 : 0  
* 성경 본문 : 마가복음 11장 1-10절
설교: 김래현목사(분당만나교회 BTD담당목사)

  은혜를 사모하며 주일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 한 가지 할까요? 
  여러분, 왜 이 자리에 나오셨나요? 은혜 받기 위해? 직분자이니까? 예, 뭐 다 좋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찬양을 통해,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은혜받는 거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성장에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은혜 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나요? 우리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맞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 죄를 사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구원이 끝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그 순간, 눈물과 고통 많은 이 세상 빠이 빠이하고 하늘나라 가면 끝이예요. 구원받았는데, 세상에 더 남아있을 이유가 없쟎아요?

  자, 그러면 우리가 왜 이 세상에서 이렇게 호흡하면서 오늘을 살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시간상으로는 부활주일 일주일 전인 종려주일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올해 부활주일은 이미 지나갔으니까 시간상으로는 맞지 않지만 사실 성경에 있는 모든 시간, 모든 사건이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매순간, 매시간, 날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생각한다면, 오늘 말씀 역시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와서 공생애 사역의 절정을 이루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쓰임 받는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어떤 제자들은 주님의 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어떤 제자들은 주님의 앞뒤에 서서 주님을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주님 가시는 길에 펴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려가지를 꺾어 흔들며 왕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의 이름을 환호하며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일 귀하게 쓰임 받은 자들은 그들이 아니라 작은 나귀새끼 한 마리 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라는 마을까지 왔을 때 제자들을 베다니라고 하는 마을로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보면 나귀새끼가 있는데 그 나귀새끼를 풀어 끌고 오너라.” 요즘은 자동차가 보편적인 교통수단이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나귀가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요즘도 렌트카가 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예루살렘 큰 성에 일을 보러 가는 사람들은 나귀를 대여해 주는 곳에 들러서 나귀를 빌려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마을에 갔을 때 나귀를 대여해 주는 곳이 있었습니다. 많은 나귀들이 매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끌고 오너라.”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본 경험이 없이 아직은 어린 티가 나고 아직은 경험도 없고 힘도 없고, 노련함도 없어 서툴기 짝이 없는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이왕이면 힘 있고, 능력 있고, 경험 많고, 노련함이 있는 나귀를 찾는데 이런 볼품없는 새끼나귀를 선택하느냐고 물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이 분부한 한 마디를 전달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 한마디에 다른 이유도 설명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가 쓰시고 싶어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가 쓰시기 위해 선택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의 본문의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다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의 사건은 제자들에게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충격적이고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이미 49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되어 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4절과 5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시는 길에 일만대군의 카퍼레이드가 아니고 한 마리 나귀새끼가 영광스럽게 쓰임을 받을 것을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에 예언해 두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귀새끼 한 마리를 쓰시는 그 일도 수백년 전부터 미리 계획하시고 준비하셨다는 기록 앞에서 저는 가슴이 떨렸습니다. 작은 짐승 한 마리도 이토록 섬세하고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쓰셨다면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남겨진 인생의 세월이 얼마이든지 그 인생의 세월 속에 묻혀있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크고 놀라울까요? 여러분, 가슴이 설레이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어쩌다가 이 땅에 태어난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당신을 특별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오늘의 그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에 빠진 우리를 살리시려 그 아들을 죽였습니다. 독생자 예수를 버리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인정하시나요?

  우리가 물건을 살 때 천원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기에 천원 주고 삽니다. 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에 만원과 바꿉니다. 100원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을 100만원과 바꾸는 바보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과 나를 바꾸신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하나님의 판단 아니겠습니까? 쉽게 다른 말로는 그만한 가치 있는 일에 나를 쓰시고 싶은 하나님의 의지의 결정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값싸게 쓰여지다가 아무렇게나 버려져도 괜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창세전에 하늘과 땅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 세상에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오늘의 내 모습을 계획하셨고 가치 있는 일에 당신을 쓰시기로 작정 하셨음을 인정하십시오.

  짐을 나르는 일에 쓰임 받은 나귀도 있고 수레를 끄는 일에 쓰임 받는 나귀로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는 영광스런 나귀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왕에 태어나 두 번 다시 살 수 없는 육신의 세월을 살면서 귀하게 쓰임받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예수님을 위해서 알뜰하게 영광스런 도구로 쓰임받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는 큰집, 하나님의 집에는 많은 그릇이 있는데 금으로 만든 그릇도 있고 은으로 만든 그릇도 있고 흙으로 만든 질그릇도 있고 나무로 만든 나무그릇도 있다고 했습니다.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다 유감없이 버리고 마는 그릇도 있다고 했습니다. 큰 그릇은 큰 그릇대로 쓰시고 작은 그릇은 작은 용도로 그 그릇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쓰지 못하고 가져다 버리는 그릇은 깨어진 그릇입니다. 일회용 종이컵은 한번 쓰고 두 번 다시 쓰기를 포기하고 쓰레기통에 버리고 마는 일회용 그릇입니다.

  금으로 만들었으니 귀하게 쓰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무로 만들었으니 천하게 쓴다는 말도 아닙니다. 주님이 쓰시기에 편한 그릇, 언제라도 주님이 쓰시고 싶은 그릇, 그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다. 이왕이면 주님이 쓰시고 또 쓰시고 싶은 그릇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쓰실 때만 가치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쓰실 때만 행복한 것이 인생이라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쓰실 때만 형통한 것이 인생이라는 그릇입니다. 어떤 경우도 커피 자판기의 일회용 종이컵으로는 쓰임 받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픔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떤 인생으로 내 인생을 살겠다는 야무진 꿈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돌이켜 살아온 세월을 볼 때 손에 쥔 것, 아무것 없고, 이룬 꿈 하나도 없는 초라한 인생이 서글퍼지는 분은 아니 계신가요?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늘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최고의 모습으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가졌으면 가진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실패했으면 그대로, 넘어졌으면 또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최고의 인생으로 최고의 그릇으로 하나님은 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운 것이 별로 없는 세상말로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기잡는 것외에 미래도 또 다른 꿈도 가능성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의 손에 붙잡혀서 한 세기를 바꾸는 영적 거인으로 쓰임받았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굴다 모세의 손에 붙잡혀 양치는데나 쓰이던 별 쓸모없는 그 막대기가 하나님의 손에 잡히니 홍해를 갈랐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쏟아 목마른 백성들의 목마름을 해결했습니다.

  엘라 골짜기에 나뒹굴던 몇 개의 돌맹이가 다윗의 손에 잡혔을 때 골리앗을 죽이고 민족을 구하는 승리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벳세다 들판의 오병이어의 사건을 아시지요? 보리떡 5개, 물고기 두 마리 / 한 아이의 점심도시락이었습니다. 한 어린 아이의 주린 배를 채우기에도 넉넉지 못한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게로 가져 오너라.” 주의 손에 올려졌을 때 수천, 수만 명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귀한 도시락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내 모습이 아니라 나를 쓰시고 싶은 주님의 의지가 아니겠습니까? 주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 아닐런지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르켜 직접 “주 = 큐리오스”라고 표현하신 곳은 이곳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인이다.” “니가 주인이 아니란다! 내가 주인이다!” 함성 같은 주의 음성입니다. 여러분, 내 인생, 내가 주인인줄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시간 내가 주인인줄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물질 내가 주인인줄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자식 내가 주인인줄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 분은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주인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우리의 주인임을 인정하십시오. 가슴마다 예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주 사랑이 벅차서 주를 위해 자신을 드려 살기 원하는 그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해라” “내가 너를 쓰겠다”

  오늘 말씀 가운데 한 가지 더 제가 주목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2절 하반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매인 나귀를 풀어야 주님이 쓰실 수 있습니다. 풀어서 끌고 와야 주님이 타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매여 있습니까? 질병에 묶여 있지는 않은가요? 묶인 질병으로부터 회복되어 건강함으로 주님 앞에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묶여있지는 않은가요? 묶인 것이 풀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거꾸로 돈의 인색함에 묶여 있지는 않은가요? 그 결박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돈에 매인 채 주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저주에 매인 채 주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매여 있는 나귀는 주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풀어 끌고 주님 앞으로 오십시오. 당신의 자녀들도 너무 공부 공부, 그러면서 헛된 곳에 묶어두지 마세요. 풀어 주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들을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남겨진 인생도 주님께 풀어서 끌고 오십시오. 주님으로 쓰시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묶인 것들이 풀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쓰셔야 할 것들이 엉뚱한 곳에 묶여 있으면 풀렸던 것도 묶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쓰시옵소서.” 주의 손에 잡히면 어떤 묶였던 것도 풀리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쓰셔야 할 것들, 주님이 쓰시지 않으면 내가 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지 못하면 마귀의 손에 붙잡혀 쓰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 시간, 하나님이 쓰지 못하면 마귀가 쓰는 시간이 됩니다. 내 물질, 내 재능, 하나님이 쓰지 못하면 사탄이 사용하고 맙니다.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한 것들이 어디로 흘러가던가요? 결국 내 영혼을 피폐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곳으로 흐르지 않던가요?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축복하십니다. 크게 받아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크게 일하면 크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자, 묶여 있는 자를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 중 가장 축복된 인생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은 우리 집의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공동체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즉, 내가 어느 공동체나 모임에서, 있는 그 곳에서 쓸모 있고 필요한 사람으로 요긴하게 쓰임 받을 때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미국의 유명한 시사 잡지 타임지가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을 선정했는데 그중에 1위가 유명한 여성 토크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였습니다. 그녀의 자서전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책에 보면 윈프리의 네 가지 인생철학이 있습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모퉁이돌 선교회 카타콤 소식지에 있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배고프고 병들고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도 밥을 준다고 하니 바지를 걷어 올리고 징검다리를 하나 둘 조심조심 건너 오셨습니다. 남루한 옷차림, 그는 몹시 추위에 떨고 있었고, 신발은 다 헤어져 있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79세였습니다. 할아버지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비굴하지 않으며 정직하였고 거룩함과 경외함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나누기 전 한 마디 말을 던졌습니다. “왜 나오려고 하세요?” “찬송이나 마음 놓고 한번 불러보고 싶어서…” 할아버지가 눈길을 피하려 땅 바닥에 시선을 두고 우물우물 쏟아 낸 말입니다. “언제 나오실 수 있으세요? 빠를수록 좋지 않을까요?” 순간 내 머리 속에는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65명의 탈출자들의 말을 들었던 터여서 비용을 계산하며 방법과 이동할 길목들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공안들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 그리고 어느 산을 넘어야 할지, 그러나 긴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찬송 한 번 마음 놓고 불러보고 싶다는데 무슨 설명을 붙여야 할까? ‛도와 드리겠습니다’ 한 마디로 결론 내려 했습니다. 순간 노인은 이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습니다 “그래도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그는 일어나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가신 후, 한 10분이나 걸렸을까? 노인이 돌아오셨습니다. 노인의 얼굴을 보니 그 거친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며 주먹은 꽈악 쥔채로 몸을 곧게 세우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물었소이다. 저 미국에서 온 이목사가 우릴 돕겠다는데 따라 갈까요?" 라고,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들을 북조선에 남겨두는 줄로 아느냐? 라고 하시더군요.” 서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노인의 어깨가 들썩거렸습니다. 그는 흐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목사님, 매 맞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굶는 것도 하나님의 목적이랍니다. 혹시 기회가 주어지면 남조선으로 가서 찬송이라도 실컷 부르고 아버지 집에 가고자 했는데 이 땅에 남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시니”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어서 가시라요! 경찰이 온다지 않소?” 누군가가 노인에게 알린 모양이었습니다. 일단은 철수해야 했지만 저는 좀 더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가지고 간 돈도 드려야 했고, 노인의 말도 좀 더 들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서울로 가시자고 한 번 더 권하는 제게 “나도 아오. 자유가 무엇인지를, 예배당 종도 쳐봤고, 성가대도 주일학교 교사도 해봤지요. 하지만 이 자리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시니, 자유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소? 압네다. 나도 압네다. 자유라는 게 좋은 게지. 마음 놓고 성경 읽고, 찬송하고, 새벽기도 나가고, 헌금도 할 수 있고…”

  노인 외에 다른 이들이 재촉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사를 드리려다가 무릎을 꿇고 노인이 신고 온 신발에 입술을 대고 우는 동안 나의 목에 눈물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재촉하는 손길이 있어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드리고 “안녕히 계시라요.” 인사를 하자 그렇게 점잖았던 노인의 음성이 강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천국에서 만나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삶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이미 충분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여 예배하는 우리는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도 우리가 성공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 그분의 생명책에 우리의 삶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의 보좌에는 하루에도 수백번 하나님 대신 내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 없이 교만하여 분노하기도 하고, 무기력하기도 하고, 죄의식 없이 끝없는 죄를 반복하여 짓고 있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기억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그런 우리가 안타까워 하나님 우리를 만나주시는데 그때만 반짝 정신 차리다가 다시 교만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일삼는 상한 심령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간 결단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부르신 곳에서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평안할 수 있는 진짜 성공의 삶을 살기를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북한에 있는 한 노인의 고백처럼 매 맞는 것도, 굶주리는 것도, 남아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 순종하겠다는 그의 거룩한 예배를 우리도 갖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삶을 감사로 받으며, 있는 그 자리에서 쓰임받는 심령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바쳐서 하라고 명령하신 일입니다. 내가 그것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계획하신 그 일, 내 재능과 시간과 건강과 물질과 생명을 바쳐서 하라고 하시는 그 일이 무엇입니까? 쓰임받을 수 있음이 축복임을 깨닫고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주님의 음성 앞에, 우리의 묶여진 것 모두 다 풀어져서 마음껏 쓰임받는 인생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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